"다, 담. 나 기억해?"
일본어로 자신을 부르는 발음도 이젠 익숙했다. '당'이나 '단'이라고도 들리는, 하지만 자신을 사랑해서 몇번이고 연습해 '담'에 가까워진 어중간한 발음.
기억하느냐고 물었지. 담은 물론 기억할 자신이 있었다. 빙긋. 얼굴에는 언제나와 같은 은은한 미소를 걸고, 뒤돌아보며 흩날리는 분홍색 머리칼은 얇은 모발이 푸스스 흩어져 더욱 시야를 사로잡는다. 눈매를 가늘게 휘며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떤 담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 언제나의 승리감을 느꼈다.
사랑하는 이 특유의 비굴한 얼굴.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달난, 지울 수 없는 초조함. 그런 것들을 담은 끔찍이도 사랑했다.
"아아, 소타. 소타 맞지? 요즘 안보이더니 무슨 일이에요?"
"그, 그게. 일이 좀 있었어. 그래서."
소타. 저 녀석은 드물게 호스트로 일하며 만난 이였다. 그가 일하는 곳은 주로 여성 손님들을 받았기에, 담과 만난 남자들은 개인적인 경위로 만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렇게 같은 호스트를 꼬시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고보니 파칭코 중독이었던가~.'
제대로 일에 나오지 못한 이유랄 것도 뻔했다. 크게 따서 즐기다가, 흥분해서 더 큰 돈을 걸거나 꾼들의 판으로 갔다가 모두 잃는다. 그 뒤로는 어떤 생각도 못하고 어디서든 돈을 끌어와서 저질 온라인 도박에 꼴아박고 폐인이 된다. 한국에서도 흔히 보이는 패턴이었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한국은 파칭코같이 대중적인 도박장이 없다는 정도일까.
대체로,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위로를 필요로 하거나 돈을 필요로 하거나.
'돈 달라고 매달리는 건 구질구질해서 싫은데.'
그럴 확률은 적어보였지만.
이름 하나 불러주었다고 추레한 몰골에 신경쓰며 눌러쓴 후드를 만지작 거리던 남자의 표정이 단숨에 환하게 밝아졌다. 저렇게 자신의 호감을 의식하고 있다면 용건은 돈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가끔씩 돈을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주겠다며 돈을 달라는 이들도 있었지만.
담은 그런 사소한 것까지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많이 힘들었겠어요. 밥은 잘 먹었어요? 얼굴이 많이 수척한데."
손을 뻗은 담이 소타의 거슬한 뺨을 만졌다. 물론 엄지로 뺨을 문지르는 척 입꼬리와 입술을 건드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으응, 뭐. 적당히. 그보다 있잖아, 담."
"네에. 편하게 말해보세요."
먹진 않았다는 뜻이군. 그렇게 상대의 의도와 걱정의 말을 머릿속으로 짜맞추던 담은 아주, 아주 오랜만에 보는 풍경을 마주했다.
달빛도 잘 들지 않는 뒷골목.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에 서늘하게 빛나는 금속.
"나랑, 심중해줘."
"심중?"
잠시 머릿속에서 일본어 사전을 뒤적이던 담이 한국어로 말했다.
"아, 동반자살?"
하하. 웃음이 나왔다. 오늘 밤 같이 놀 상대를 구했나 싶었더니 느닷없는 살해협박이라니. 정말이지 우습지 않은가.
"풋, 하핫. 아... 이런 건 중학생 때 졸업해야죠."
담은 언제나와 같이 나긋한 목소리로,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알아들어도 상관 없었다.
"모, 못알아들을 말 하지 마!"
예상 외의 반응이었던 것일까. 담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마를 쓸어넘기자 불안한 표정의 소타가 소리쳤다.
"쉬이. 들키면 어쩌려고요."
검지를 들어 소타의 입 앞에 가져다 댄 담의 눈꼬리가 이번엔 야살스레 휘어졌다. 우스워 견딜수가 없다는 듯, 조소를 담아서. 밀착한 두 사람, 시야의 높이는 담이 우위였다. 보이는 선이 얇을 뿐, 그 또한 타고난 골격과 실전으로 다져진 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러지 말고, 가게에 다시 나와요. 소타를 찾는 손님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그런 건 이제 의미 없어. 담, 나하고 같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똑같이 그 몸뚱이조차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자신의 태도가 심상찮아 겁을 먹은 것일까. 그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평범한 죽음에의 두려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가끔은 이런 촌극에도 어울려야 인생이 즐거운 법 아니겠는가.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해야겠어요."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로 딱 두걸음의 거리. 담은 그만큼의 거리를 두었다. 가깝지만 절대 넘을 수 없을 거리를.
"저는 이렇게 죽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요. 진부하고, 재미 없잖아요?"
순식간에 생과 사가 갈리는, 사선을 넘나드는 곳이라면 모를까.
그와 동시에 떠오른 것은 짙은 붉은색이었다. 턱 끝에서 흔들리는 칼단발과 푸른 눈, 맑게 아름다운 얼굴. 최노엘.
그래, 악마사냥이야말로 죽음이 아깝지 않은 행위였다. 비일상이 주는 결코 평범하겐 손에 넣을 수 없는 쾌락. 죽음에 극히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몸은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흥분과 각성을 몸에 주입한다. 그곳에 중독된 담에게 동반자살이니 정사니 하는 것은 시시한 구닥다리 이야기일 뿐.
"믿, 믿었는데, 담만은, 담만은 다를거라고...!"
식칼을 든 소타의 손이 번쩍, 위로 들린다. 흥분에 몸을 내맡긴 공격. 무술이니 뭐니 하는 것을 제대로 배우진 않았지만 악마와 싸우며 익힌 실전 감각은 담에게 공포보단 이성을 가져다 주었다.
'무식하게 달려들어봤자.'
몸을 물리며 피하려 한 그때, 눈 앞에 그림자가 졌다.
"야! 여담!"
익숙한 목소리. 아니, 익숙하다 못해 언제나 당연히 듣는 것이 된 목소리.
비릿한 쇠냄새가 풍겼다.
"서태헌?!"
"아오... 더럽게 아프네."
태헌의 등에 밀착한 상태로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담에 비해 머리 하나하고도 한뼘은 더 클 덩치가 시야를 막았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오랫동안 태권도며 검도, 유도... 여러 무술에 헬스까지 꾸준히 한 태헌이 이런 상황에 더 잘 대처할거라 여기겠으나, 여담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실전을 겪어보기 전까지, 머리의 나사 하나 정도는 풀리기 전까지 사람은 제대로 '죽을지도 모르는 위협'에 대처하지 못한다.
담은 불길한 피냄새가 소꿉친구의 배가 꿰뚫린 탓은 아니길 바랐다. 그래서야 귀찮을 뿐이니까. 일이 커지는 것도,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것도.
다급하게 돌아 확인한 광경은 다행히 최악의 상황에선 거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저 태헌이 칼날을 손으로 쥐었을 뿐. 소타 또한 정말로 사람이 다친 상황에 놀라 굳은 채였다.
"칼, 이리 줘. 아니면 뒤로 던지든가."
"이야, 진짜 넌 미친놈들만 꼬시고 다닌다."
아프다는 것 치고는 입을 잘 놀렸다. 태헌이 던진 칼을 소타가 주울 수 없게 더 멀리 걷어찬 담은 평소와 같이 태헌을 올려다보며 샐쭉 웃었다.
"글쎄. 내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 아닐까?"
-
삐용- 삐용-.
사이렌 소리가 시끄러운 현장을 벗어나, 담과 태헌은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병원비도 내주고, 고맙다 야."
"돈은 내가 더 잘 버니까. 네가 갑자기 끼어들지만 않았으면 잘 해결했을 일이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에이씨. 걱정해서 나서줘도 난리야."
태헌이 툴툴거렸다. 아직은 마취 덕에 상처가 아프지 않아 부릴 수 있는 여유기도 했다.
"야, 그보다 보험도 안되는데... 얼마 나왔어?"
"비-밀. 형아를 너무 사랑하는 태헌이가 기특해서 내주는 거예요?"
담의 하얀 손이 대기실 의자에 앉은 태헌의 머리칼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만하라는 불평이나, 빨개진 상대의 귓바퀴 등은 무시한 채. 담은 언제나 자신을 사랑해 미친 것들이 사랑스럽기 그지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