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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JB]데칼코마니의 오류

흐릿한 인영이 보인다. 안개 속에 흐릿해진 흔적 뿐인 아득한 존재. 어렴풋이 인간, 혹은 인간의 형상을 갖춘 존재임을 알 수 있을 뿐인 그에게 선명한 것은 늑대 형상의 가면 뿐이었다.

J3는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꿈이구나. 더이상 떠올릴 수 없도록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은 꿈 뿐이었으니까.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무언가를 간헐적으로 무의식의 잔재라는 찌꺼기에 상상력이라는 살을 입혀 되돌리는 공간.

그리고, 바라지 않는 무언가를 직면시키는 공간이기도 했다. J3는 타의로 지워진 그 존재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별다른 유감은 없었다. 자신이라고 자각되지 않는 존재를 자신이라며 들이대는 것이 더 귀찮다면 귀찮았다.

여행자가 여행을 떠났을 때의 배와 몇년 후 돌아왔을 때의, 수년간 정비와 수리를 마친 배가 같을 수 있는가. 모든 부품과 뼈대가 갈아끼워진 배는 이전의 배와 같은 여행자의 배인가. 흐릿한 기억 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던 난제 중 하나였다. 만약 배도 배의 주인도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면... 그 배는 더이상 처음 떠났던 여행자의 배는 아니지 않을까. 적어도 J3가 느끼는 자신은 그랬다.

J3는 자신이 잊은 것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더이상 자신이 아니게 된 누군가를.

아, 앉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도 잠깐, 어느새 눈앞에는 익숙한 의자가 놓여있었다. 경비팀에서 주로 쓰는 의자였다. 익숙하게 의자에 눕듯이 앉아 기대자 끼이익, 한계까지 뒤로 밀린 등받이가 우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 부러진 적은 없었으니-사실 부러져도-상관 없었지만. 익숙한 것이 주어지자 날카롭게만 벼려지던 감각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쉽게 말하자면 긴장이 풀렸다고 해야할까.

J3, 경비반장.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이란. 누군가는 추락한 곳이라고 할 지하는 어느새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더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바닥이기에 도리어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일지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은 깨진 달걀에게는 부질없는 질문이었다.

시선을 들어올리자 자신과 정확히 거울상으로, 의자에 앉은 늑대가면의 사내, B조 조장이 보였다. 그가 앉은 의자는 끼익거리는 소음 하나 나지않는 사무용 의자의 종결이라 불리는 고급의자였으며, 허리를 가볍게 등받이에 기댄 자세로 가볍게 다리를 꼰 채였다. 안개에 가려져 흐릿하게 보이는 B조 조장의 모습 속에서 늑대를 닮은 가면만이 선명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양.

정작 정말 '늑대'라 부를 수 있는 꼴을 가진 것은... 깜빡, 깜빡, J3는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늑대의 앞발과 닮은 무언가의 형상이 교차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톡, 톡. 손가락을 까딱여 의자의 팔걸이를 두들길 때마다 일렁이는 형상은, 검고 끈적한... 타르를 닮은 액체가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할 말이라도..."

"할 말은, 네 쪽에 더 많지 않을까 싶은데."

"그닥..."

J3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궁금한 점이 있지도 않았고, 인과적으로 상대가 자신의 과거라곤 하지만 정말로 연속성이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이었으므로.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J3에게 남은 B조 조장의 흔적이라곤 때때로 강렬한 동요를 일으키는 찌꺼기에 불과한 감정의 잔재들 뿐이었으므로.

그렇다고 해서 잊은 기억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무슨 처리를 한 것인지, 오염으로 많은 걸 잃은 탓인지 J3는 과거를 궁금해야 할 필요성도, 호기심도 별달리 느끼지 못했다. 떠올리려 할 때마다 ■■■ ■■■■... ■■■■ ■■■.

한낱 꿈에 불과한 상대에게 미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 만큼 우스운 꼴도 없었고. 한없이 덧없는 것이니 경보음도, 누군가 다급하게 깨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겠던가. 오염을 아무리 덜어내도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한계인 수준 치고는 제게 강한 제약이 있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괜찮겠지?"

"마음대로..."

제 무의식의 무언가가 'B조 조장'을 다시 불러내고 싶었는진 모르겠지만... 제약도, 오염-자신-도 위험한 반응은 없었다. 제 의식에 반응해서 뭔갈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이제와서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행태일 터다.

어쩌면 어둠 중 하나일 수도 있을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직 제 감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어느쪽이라 해도 당장은 얌전히 살피는 게 상책인듯 싶었다. 안일한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뭐... 어둠이라고 큰 문제가 있겠는가. J3는 늑대의 거대한 앞발과 겹쳐지는 자신의 손을 흘끔 보았다.

끈적... 끈적... 검은 것이 흘러내리며 점점, 인간의 형상에서 자신이 벗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야,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었으니까. 꿈에서까지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 대한 궁금증은 없을거야. 어둠이라는 판단도 서지 않았을 테고."

"..."

"좀 더 근본적인 부분으로 가볼까."

B조 조장이 턱을 매만지는 모습이 보였다. 톡, 톡. 매끄러운 인간의 손가락이 의자의 팔걸이를 규칙적으로 두들긴다.

데칼코마니 기법이라는 게 있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나뉘어진 한 면에 그림을 그리고 다시 종이를 접었다 펼치면 좌우대칭의 작품이 완성되는, 누구나 이름은 몰라도 원리정도는 알 기법. 하지만 두 그림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세상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설계되지 않았으므로. 보통 오차범위라고 부르던가. 또한 그렇게 종이를 접었다 펼쳐 그림을 반대편에 찍어내고 나면, 원본은 더이상 '원본'으로서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러니까... 자신에게서 찍어낸 B조 조장이란 결코 과거의 B조 조장이 아닌, 어딘가 왜곡된 B조 조장일 거란 뜻이었다. 의미있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J3는 굳이 꿈 속의 환상에게 너는 과거와 다르다며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지적을 할 수도 없었고.

"어쩌다 이런 꿈을 꾸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해."

"..."

"네 결론은 어땠어? 사실은,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든가."

"..."

글쎄. 그런 쪽의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굳이 자신의 내면을 헤집어서 좋을 것이 없는 입장이지 않던가. 종신직으로 전락한 전 현장탐사팀 직원이라는 것은.

"과묵한 성격이구나. 나도 수다쟁이는 아니지만, 네 앞에 있으니 꼭 수다쟁이가 된 기분이야."

"...그래서."

"방금 말엔 큰 의미가 없다는 거 알지 않아? 이런 거에만 대답해주다니."

"...글쎄.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니까..."

"또 무의식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지."

"..."

"안 그래? ■■■."

인간의 모습이 무너진다. J3는 자신의 주둥이가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크기는 인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검게 응축된 무언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샛노란 눈들이 이곳저곳 튀어나왔다 들어간다.

"의식 표면으로... 떠오르지도 못하는... 무의식이...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나른한 목소리가 평소와 같은 늘어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래, 확실히 J3는 늙고 비루한 짐승이었다. 빛바랜 존재. 그게 자신임은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늙은 짐승에겐 늙은 짐승의 지혜와 통찰이 있지 않겠는가.

"넌... 빛나고, 아름답지..."

짐승 특유의 샛노란 눈들이 일시에 감겼다. 검은 덩어리나 다름없는 형체가 점점 줄어들며 인간의 형체를 갖춘다. 마치, 오염이 사람을 빚어내듯이...

"음... 그런데 말이야... 내가 널 '그리워' 할 순 있어도... '되고싶어'할 수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의자에 눕듯이 앉아있는 바래진 사람이 툭, 고개를 등받이에 기댄다.

과거란 그런 것이다. 미래를 갈망하는 것.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는 미래 이외에는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네가... 내가 되고 싶어하면 모를까..."

흐릿하게 안개 속에 흩어지던 늑대 가면이 완전히 형체를 잃는다.

"넌... 내가 될 수 없어...."